각인자소문전설(各人自掃門前雪)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할 것이요,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 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팔진도(八陣圖) 중에 있는 말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강유겸전(剛柔兼全) 굳셈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춤. 곧, 성품이 굳세면서도 부드러움.
견우혜전(牽牛蹊田) 소를 끌고 남의 밭을 통한 지름길로 감.
겸노상전(兼奴上典) 하인이 해야 할 일까지 직접하는 가난한 양반.
경전하사(鯨戰鰕死)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고문전책(高文典冊) 귀중한 문서.
고산지전무미목(高山之無美木) 높은 산에 좋은 나무가 없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아 이름을 남기기 어렵다.
고화자전(膏火自煎) 기름등불이 스스로 자신을 태워 없앤다. 재주있는 사람이 그 재주로 인하여 화를 입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
공전절후(空前絶後) 비교할 만한 것이 이전이나 이후에도 없을 것으로 생각함.
과맥전대취(過麥田大醉) 밀밭을 지나가기만 해도 누룩 생각이 나서 취한다는 뜻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즉 오이밭을 지날 때는 몸을 굽혀 신을 고쳐 신지 않으며, 자두나무 밭을 지날 때는 손을 들어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말에서 유래. 과전이하(瓜田李下).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는 외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으면 외를 훔치는 줄 알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면 오얏을 따는 줄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들로부터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에 대한 글은 문선(文選)의 악부(樂府), 고사(古辭) 가운데 군자행(君子行)에 있는 시(詩)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자는 그렇게 되기전에 막아 혐의를 받을 사이에 처하지 아니한다. 외밭에서 신을 고쳐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바로잡지 말아야 한다. 군자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일을 미연(未然)에 막아야 하며, 혐의를 받을 곳에 몸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열녀전(烈女傳)에 실린 글을 살펴보면, 중국 전국시대인 주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신첩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뫼신지 1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으나, 신첩의 결백은 명백하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 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누구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으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위왕은 우희의 충심을 듣고 당장 간신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과전이하(瓜田李下)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 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마라는 말. (고사)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 신첩(臣妾)은 이제까지 한 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 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관리전도(冠履顚倒) 앞뒤의 순서를 바꿔서 사물을 그르치는 일.
광음여전(光陰如箭) 세월의 흐름은 화살과 같이 빠르고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다.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經典) 바깥의 특별한 전승(傳承).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함. (고사) 經典 바깥의 특별한 傳承, 언어나 문자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보고 불경을 얻는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老子는 道德經에서"성(聖)을 절(絶)하고 지(智)를 버리면 민리(民利)가 백배(百倍)하리라." 고 하여, 지식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의 불필요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딱한 것은 지식이 불필요하다고 아는 것도 하나의 '앎' 이요, 후세 사람들이 도덕경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이 노자의 사상을 알 수 있게 마련이니, 노자의 말은 오히려 지(知) 자체를 반성한 지의 지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무지(無知)를 아는 사람은 그 무지 조차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과 다름직도 하다고 하였거니와, 노자는 지의 불필요를 아는 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듯이, 지가 불필요함을 지로써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지(知) 이상의 것도 지를 통함으로써 알 수 있다.
구시인이전(歐市人而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을 전쟁터에 내보냄을 이르는 말.
구전(口傳) 벼슬아치를 주의(注擬)할 때 승정원을 통하여 아뢰고서 낙점(落點)을 받는 일. 원래 관원을 임명할 때는 으레 대궐에 나아가 주의를 하고자 낙점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이런 격식을 생략하고 이조판서가 직접 승정원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여 낙점을 받는 것을 이름. ☞ 중종실록(中宗實錄) 五十庚午 六月己亥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十四年 壬戌九月朔甲午<정족산본(鼎足山本)>
구전문사(求田問舍) 자기의 논밭이나 집 걱정만 한다는 뜻으로, 원대한 뜻이 없이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급급함을 이르는 말.
구전성명(苟全性命) 구차하게 생명을 보전함.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가르쳐 주고 마음으로 전함.
구전지훼(求全之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자 하다가 오히려 구설수에 오르는 일.
국수대호전필망(國雖大好戰必亡) 나라가 부강하여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한다. 전쟁을 즐기는 나라는 그 전쟁으로 인해 망한다는 것을 경고한 글.
금계전설(金鷄傳說) 황금의 닭이 땅속에 묻혀 있다는 전설. 황금닭이 울면 행운이 온다고 하며 천하의 모든 닭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기승전결(起承轉結) 한시(漢詩) 구성법의 한 가지. 시의를 일으키는 첫번째 `기(起)', 받아 주는 둘째 '승(承)', 변화를 주는 셋째 `전(轉)', 전체를 마무리하는 넷째 `결(結)'을 말함. 전(轉)하여, 일이 일어나고 발전하고 변하고 끝나는 과정을 이름.
낙폭전(落幅錢) 과거의 시관(試官)이 합격자 발표 후, 묵권(墨卷)을 모아 팔아 얻는 돈을 말한다. ☞ 매천야록(梅泉野錄) 卷一上
남전북답(南田北畓) 가지고 있는 전답이 여기 저기 많이 있다는 말.
남전생옥(藍田生玉) 남전에는 옥이 나온다는 말이다. 본래 남전은 서왕모가 산다는 옥산(玉山)을 뜻한다. 현명한 아버지가 재능 있는 아들을 낳은 것을 칭찬하는 뜻이다. 이 고사는 <삼국지(三國誌)>에 "오서(吳書)" '제갈각전(諸葛恪傳)'에서 나온다. 제갈각은 자(字) 가 원손이고 제갈근의 맏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재은이 있어 명성을 떨쳐 태자의 빈우(賓友)가 되기도 했다. 그는 기발한 발상과 임기응변에 뛰어나 그와 더불어 상대할 자가 없었다. 제갈각의 아버지 제갈근은 얼굴이 마치 당나귀처럼 길었다. 손권은 많은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사람을 시켜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들어와 그 당나귀의 얼굴에 긴 봉투를 붙이고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쓰도록 했다. 제갈각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붓으로 두 글자를 더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서 손권은 이것을 허락하고 붓을 주었다. 제갈각은 그 아래에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지려(之驢)."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즐겁게 웃었다. 그래서 손권은 당나귀를 제갈각에게 하사했다. 손권은 제갈각이 기이한 인물임을 알고는 그의 아버지 제갈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전(藍田) 이 옥을 낳는다고 하더니, 정말 헛된 말이 아니군요." 제갈각의 재능을 칭찬하여 한 말이다. 또한 <남사(南史)>"사장전(謝莊傳) "에도 이 고사가 보인다. 육조시대에 사장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훌륭한 문장을 짓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성장하자 아버지 사소는 용모를 아름답게 하도록 했다. 송문제는 그를 보고는 감탄하여 말해다. "남전에서 옥이 나온다고 했는데, 어찌 허황된 것이랴!"
낭중자유전(囊中自有錢) 주머니에 돈이 있다.
뇌봉전별(雷逢電別) 우레처럼 만났다가 번개처럼 헤어지다.
다전선고(多錢善賈) 밑천이 많으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도이후착불이전착(盜以後捉不以前捉) 도둑은 뒤로 잡아야지 앞에서 잡으면 안된다.
독단전행(獨斷專行) 자기 혼자의 판단으로 마음대로 행동함.
돈제양전(豚蹄穰田) 돼지 발굽을 바치고 풍년을 빈다. 가진 것이 적으면서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을 비유한 말.
동포전(洞布錢) 대원군(大院君)이 섭정할 때 장정 한 사람에게 1년에 2민(緡)씩 받아들이던 세금. ☞ 매천야록(梅泉野錄) 卷之一上
득어망전(得魚忘筌)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목적을 이루면 그 때까지 수단으로 삼았던 사물은 무용지물이 됨을 이르는 말. [出典]壯子(장자) 외물편. 가리는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가리는 잊고 만다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말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뜻을 나타낸 뒤에는 말을 잊고 만다. 나는 어떻게 하면 말을 잊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을 잊는 사람과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 말을 잊는다는 것은, 말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비와 선악 같은 것을 초월한 절대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장자는 말을 잊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득어망전이, 말을 잊은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 모든 것을 초월한 좋은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장자와 같이 반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인간의 그러한 일면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자가 보는 그 당연한 일면을 속된 우리들은 인간이 기회주의적인 모순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여간 좋든 나쁘든 인간이 득어망전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만리전정(萬里前程) 만리 같은 앞 길.
만전지책(萬全之策) 가장 안전한 비책, 즉 추호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계책을 뜻한다. (고사) 위나라 조조가 북방의 원소를 격파한 관도의 싸움은 조조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한판 승부로 평가된다. 조조는 이미 원소의 맹장 안량과 문추를 죽이고 원소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조조의 군대는 삼만에 불과하여 십만이나 되는 원소의 군대에 비해 열세였다.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던 조조는 도읍으로 후퇴할 생각조차 할 정도였다. 그 당시 유표는 형주의 장관이었는데,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어느 한쪽을 도우려 하지 않고, 조조와 원소의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다못해 한승과 유선이 유표에게 말했다. "십만의 대군을 옹호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양쪽의 원한을 사게 됩니다. 조조가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면 즉시 우리를 공격해올 것이며, 그 때는 방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조조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조는 당신에게 큰 복을 내려 줄 것이니, 대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이 바로 만전지책입니다." 그러나 유표는 의심이 많아 조조를 돕지 않았다. 결국 후에 화를 당하였으니 만전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명리양전(名利兩全) 명예와 재물을 한꺼번에 얻는다는 말.
명불허전(名不虛傳) 명예가 널리 퍼짐은 그만한 실상이 있어 퍼짐. 명예는 헛되이 전하여지는 것이 아님은 일컫는 말.
명열전모(名列前茅)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다는 뜻.
목불석전(木不石傳) 나무나 돌에도 붙일 곳이 없다. 가난하고 아는 사람이 없어 의지할 곳이 없음을 나타낸 말.
목전지계(目前之計)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 꾀.
문전걸식(門前乞食) 남의 문 앞에 가서 빌어 먹음.
문전성시(門前成市) 문 앞이 저자(市)를 이룬다는 뜻으로, 권세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빈다는 말. [출전]《漢書》〈孫寶傳〉〈鄭崇傳〉(고사)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B.C. 6∼1)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국방 장관) 왕망[王莽:훗날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움]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애제의 할머니), 정씨(丁氏:어머니)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충신들은 간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 중 상서 복야(尙書僕射:장관)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사온데[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소서."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시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소청을 묵살한 패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례(司隷)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으나 애제는 손보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주] 삭탈 관직 : 죄 지은 벼슬아치의 벼슬과 품계[品階: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빼앗고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깎아 버림.
문전옥답(門前沃畓) 집 앞에 가까이 있는 기름진 논.
문전옥토(門前沃土) 집 앞에 가까이 있는 기름진 논과 밭.
문전작라(門前雀羅) 문 앞에 새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권세를 잃거나 빈천(貧賤)해지면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 진다는 말. [출전]《史記》〈汲鄭列傳〉. 백거이(白居易)의〈寓意詩〉(고사) 전한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급암과 정당시(鄭當詩)라는 두 현신(賢臣)이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각기 구경(九卿:9개 부처의 각 으뜸 벼슬)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도 있었지만 둘 다 개성이 강한 탓에 좌천 면직 재등용을 되풀이하다가 급암은 회양 태수(淮陽太守)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이들이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면직되자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이어 사마천(司馬遷)은《사기(史記)》〈급정열전(汲鄭列傳)〉에서 이렇게 덧붙여 쓰고 있다.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賓客)이 열 배로 늘어나지만 세력이 없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또 적공(翟公)의 경우는 이렇다.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빈객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그가 면직되자 빈객은 금새 발길을 끊었다. 집 안팎이 어찌나 한산한지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門外可設雀羅]'였다. 얼마 후 적공은 다시 정위가 되었다. 빈객들이 몰려들자 적공은 대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一死一生 卽知交情(일사일생 즉지교정)]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貧一富 卽知交態(일빈일부 즉지교태)]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은 나타나네 [一貴一賤 卽見交情(일귀일천 즉현교정)]
문필쌍전(文筆雙全) 글을 짓는 재주와 글씨 쓰는 재주를 모두 골고루 갖추고 있음.
물간사전(物揀赦前) 은사(恩赦)의 혜택을 입지 못할 죄.
미연지전(未然之前) 아직 그렇게 되기 전.
백우장전(白羽長箭) 흰 새의 깃털을 단 화살.
백전노장(百戰老將) 여러 차례 큰 싸움을 치른 늙은 장군이란 뜻이니, 세상 일에 경험이 많아 당해 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을 말함.
백전백승(百戰百勝)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긴다는 말. [출전]《孫子》〈謀攻篇〉(고사)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서 오왕(吳王) 합려(闔閭:B.C. 514∼496)를 섬긴 병법가 손자(孫子:孫武)가 쓴《손자》〈모공편(謀攻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승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서 얻는 승리와 적을 공격한 끝에 얻는 승리인데 전자는 최상책(最上策)이고 후자는 차선책(次善策)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다[百戰百勝]'해도 그것은 최상의 승리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승리인 것이다. 곧, 최상책은 적이 꾀하는 바를 간파하고 이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 다음 상책은 적의 동맹 관계를 끊고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적과 싸우는 것이며, 최하책은 모든 수단을 다 쓴 끝에 강행하는 공성(攻城)이다." [주] 여기서 '백(百)'이란 단순과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三)' '구(九)' '천(千)' '만(萬)'등과 마찬가지로 '많은 횟수'를 가리키는 것임.
복마전(伏魔殿) 악마가 숨어 있는 전당. 또는 나쁜 일이나 음모 등이 끊임없이 꾸며지고 있는 곳. (고사)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전염병이 유행하자 이를 걱정한 인종은 장시 성 신주(信州)의 용호산(龍虎山)에 사는 장진인(張眞人)이라는 도사에게 한시바삐 상경해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기도를 시키기로 했다. 그 사자로 전의 태위(太尉) 홍신(洪信)을 임명했다. 홍신이 용호산에 도착하자 마침 장진인은 외출중이었다. 그는 도관(道觀:도교의 절과 같은 곳)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중,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곳 문 위에 "복마지전(伏魔之殿)"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문에는 커다란 자물통이 매달려 있었으며, 문짝의 틈새에는 10여장의 봉함지가 붙어 있었다. 홍태위가 이상히 여겨 물어 보았다. "이건 무슨 신전이오?" 안내를 해주던 도사가 말했다. "그 옛날에 노조천사(老祖天師)님이 마왕을 진압하신 어전입니다. 함부로 열어서 마왕을 달아나게 하면 큰일나니 결코 열면 안 된다고 금지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홍 태위는 호기심이 생겨, 꺼림직해 하는 도사를 위협해 억지로 문을 열게 했다. 들어가 보니 안은 텅 비어 있고, 한복판에 돌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돌비 뒷면에 "홍을 만나 연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홍 태위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봐라, 몇백 년 전부터 내가 여기 와서 이걸 연다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생각건대 마와은 이 돌에 있는 모양이다. 어서 마왕을 파내라." 도사는 할 수 없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돌을 파내었다. 1미터쯤 팠을 무렵 2미터 사방쯤의 돌 뚜껑이 눈에 띄었다. 홍 태위의 재촉에 못 이겨 마지못해 그 뚜껑을 열자, 속에서 굉장한 소리와 함께 한줄기의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천장을 뚫고 하늘로 뿜어 오르는가 싶더니, 몇백 줄기의 금빛으로 되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때 장진인이 돌아왔다. 그는 넋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홍 태위에게 말했다. "당치않은 짓을 하셨군요. 거기에는 36의 천강성, 72의 지살성, 도합 108의 마왕을 가두어 둔 것입니다. 이것을 풀어 놓았으니, 마왕들은 머지않아 천하에 소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습니다." 홍 태위는 겁에 질려 허둥지둥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마왕을 풀어 놓은 일은 단단히 입막음해 놓았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철종(哲宗) 때에 장진인이 염려했던 대로 108의 마왕은 송강(宋江) 등 108명의 사나이로 환생하여, 운명의 실에 의해 양산박(梁山泊)으로 끌어 들여져《수호전(水滸傳)》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출전]《수호전(水滸傳)》
본말전도(本末轉倒) 일이 처음과 나중이 뒤바뀜. 일의 근본 줄기는 잊고 사소한 부분에만 사로잡힘.
부부전도할수(夫婦戰刀割水)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부월당전(斧鉞當前) 작은 도끼나 큰 도끼가 눈앞에 있다. 무거운 형벌로 죽음이 앞에 닥침을 가정하는 말.
부전자승(父傳子承) 대대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함.
부전자전(父傳子傳)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들이 아비를 닮음을 비유한 말.
비인부전(非人不傳)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인격과 덕을 겸비한)
사전여수(使錢如水) 돈을 아끼지 않고 물쓰듯 함.
산전수전(山戰水戰) 온갖 풍상을 의미하는 말. [孫子兵法]하면 떠오르는 名言이 있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을 해도 위태롭지 않다) 情報化, 國際化를 부르짖는 요즈음 이보다 더 適合한 警句가 있을까. 經濟戰爭도 一種의 戰爭임에야. 百戰은 1백가지의 戰略을 動員한 戰爭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戰爭이었을까. 明나라의 開國 功臣 유기(劉基 1311-1357)는 [百戰奇略]이라는 책에서 歷代의 兵法書를 參考해 1백가지의 戰爭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火戰, 速戰, 挑戰, 和戰, 交戰 등도 들어 있다. 山戰이나 水戰도 물론 百戰의 하나다. 山에서 싸우면 山戰, 江이나 바다에서 싸우면 水戰이다. 그러나 山戰이나 水戰은 땅에서 싸우는 地戰보다 훨씬 어렵다. 極度의 體力을 要求할 뿐 아니라 많은 犧牲者 까지 覺悟해야 한다. 따라서 山戰이나 水戰을 다 치른 兵士라면 最高의 精銳兵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말로 '歷戰의 勇士' 또는 '百戰老將'인 셈이다. 흔히 하는 말에 '山戰水戰 다 겪었다'는 말이 있다. '世上의 온갖 風霜을 다 겪었다'는 뜻으로 '苦生을 많이 했다'는 意味도 있겠지만 그만큼 '强靭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 세상이 몰라 볼 정도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말. (고사
생전부귀사후문장(生前富貴死後文章) 살아 있을 때에는 부귀를 누리며 살고, 죽은 뒤에는 좋은 문장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가장 좋다.
석전경우(石田耕牛) 자갈밭을 농사짓는 소란 뜻으로, 황해도 사람의 근면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을 평한 말.
세세상전(世世相傳) 여러 대를 두고 전하여 내려옴.
속등자이전(速登者易顚) 빨리 오르려고 하면 넘어지기 쉽다. 너무 요령을 피우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기 쉽다는 것을 일컫는 말.
수무분전(手無分錢) 가진 돈이 조금도 없다.
수전노(守錢奴) 돈만 지키는 노예. 돈을 모을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인색한 사람.
식음전폐(食飮全廢) 아주 음식을 먹지 아니함.
식전방장(食前方丈) 식사를 할 자리에 사방 한 길 넓이로 여러 가지 음식을 가득 벌려 놓다. 매우 호사스럽게 차린 음식을 이르는 말.
신낭전(腎囊錢) 조선 고종(高宗) 때 장정(壯丁)에게 매기는 세금을 비꼬아 하던 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願納錢)과 사대문(四大門)의 통행세(通行稅)까지 받아도 부족하므로 지방에서 장정의 수를 따져 돈을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이를 '신낭전'이라 비꼬았다. ☞ 매천야록(梅泉野錄) 卷之一上
심기일전(心機一轉)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
십전구도(十顚九倒) 여러 가지 고생을 겪음.
아전인수(我田引水) 제 논에 물대기.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말함.
아전즉극(我戰則克) 도(道)를 아는 사람이 싸우면 꼭 승리한다.
악사전천리(惡事傳千里) 나쁜 사건의 소문은 멀리까지 퍼진다. 착한 일은 입에 잘 안 올라도 좋지 않은 일은 굳이 들추어 떠들어대는 세정(世情)을 말한다.
악전고투(惡戰苦鬪) 죽을 힘을 다하여 고되게 싸움.
안전막동(眼前莫同) 못 생긴 아이도 늘 가까이 데리고 있으면 정이 저절로 생긴다는 뜻.
양전옥답(良田沃畓) 기름진 밭과 논.
역근전(役根田) 군보(軍保)가 경작하는 전지(田地). 군보는 즉 정병(正兵)을 돕는 조정(助丁)인데, 이조 후기에는 양병(養兵)의 비용에 쓰기 위하여 군보에게 역(役)을 면해 주고 그 대가로 벼나 곡식을 바치게 했다. 그러다가 군보가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에는 자기 전지를 그 마을에 남겨 두어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베나 곡식을 대신 바칠 수 있게 하였다. ☞ 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兵典) 첨정(簽丁)
역근전(力根田) 병역의 대가로 내는 군포(군포)의 밑천으로 삼는 토지. 병역 의무자가 죽거나 이사를 가면 그 마을에서는 군역이 면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군정(군정)이 문란해졌을 때 아전들이 실제 없는 사람에게도 살고 있는 또는 살아 있는 것으로 군적에 그대로 올려 놓고 이웃에게 군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이사를 가거나 죽더라도 얼마간의 토지를 남겨 두었는데 이를 역근전이라 한다. ☞ 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兵典)六條 第一條 첨정(簽丁)
역명지전(易名之典) 임금으로부터 시호(諡號,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주는 칭호)를 받는 은혜.
역전경주(驛傳競走) 장거리를 이어서 달리는 경기로서 몇 사람이 한 팀을 이루며 각각 한 구간을 계주하는 것.
연전연승(連戰連勝) 싸우기만 하면 계속 이김.
요두전목(搖頭顚目) 요령을 얻지 못하다.
용전여수(用錢如水) 돈을 물과 같이 흔하게 씀.
용전호쟁(龍戰虎爭) 용과 호랑이의 싸움. 제후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이르는 말.
우전탄금(牛前彈琴) 어떠한 말을 하여도 알아듣지 못함. 소에게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둔한 사람에게 도리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헛된 일이라는 뜻. 우이독경(牛耳讀經), 마이동풍(馬耳東風)과 비슷한 말임.
원전석의(原典釋義) 기준이 되는 원래의 것을 풀이하다.
원전활탈(圓轉滑脫) 말이나 일을 하는데 모나지 않고, 매우 부드럽고 원활하게 처리함.
유사이전(有史以前) 인류의 역사가 생기기 전의 시대.
유연전술(柔軟戰術) 부드러움으로 정면돌파를 피하면서 옆으로 진격하여 싸우는 일.
유위변전(有爲變轉) 세상은 항상 변화무쌍하여 잠시도 머물러 있는 법이 없어 항상 변한다는 뜻.
유전동경유반동식(有田同耕有飯同食) 논이 있으면 함께 갈고 밥이 있으면 함께 먹는다는 뜻. '논 있으면 함께 갈고, 밥 있으면 함께 먹고, 옷 있으면 함께 입고, 돈 있으면 함께 쓴다. '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평등사상을 표현한 말로서 태평천국의 난에 일어났을 때, 그 태평군의 이상이자 구호였다. <天朝田苗制度(천조전모제도)>에 기록이 있다.
유한정전(幽閒貞專) 여자의 덕이 높음을 이름.
윤회전생(輪廻轉生) 수레바퀴가 돌아 끊임이 없듯이 중생이 사집(邪執)·유견(謬見)·번뇌(煩惱)·업(業) 인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생사를 끝없이 반복해 감을 이름.
음마투전(飮馬投錢)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할 때 먼저 돈을 물 속에 던져서 물값을 갚는다는 뜻으로 결백한 행실을 말함.
음지전양지변(陰地轉陽地變) 음지도 양지로 될 때가 있음.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말. (고사) 송(宋)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法語)를 기록한《전등록(傳燈錄)》에서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의 중 보제(普濟)의《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微笑]. '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妙德-매우 뛰어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煩惱)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아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 불립문자(不立文字 敎外別傳:모두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 곧, 진리는 마음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주]《오등회원》:《전등록》외 4부의 '등록'을 합친《오등록(五燈錄)의 초본》
이오전오(以誤傳誤) 헛 소문이 꼬리를 물고 번져가다. = 이와전와(以訛傳訛)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탕에서 싸우는 개.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평한 말. 또는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몰골 사납게 싸움. (고사) 조선 태조는 즉위 초에 정도전에게 명하여 팔도(八道) 사람을 평하라고 한 일이 있다. 이에 정도전은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 강원도는 암하노불(岩下老佛),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 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평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태조는 아무 말도 좋으니 어서 말하라고 거듭 재촉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말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이내 얼굴이 벌개졌는데, 눈치 빠른 정도전이 이어 말하길 "그러하오나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올시다" 하니 그제야 용안(容顔)에 희색이 만연해지면서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산세와 위치를 논하고 있으며, 팔도의 위치와 그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즉, 경상도는 변한 진한의 땅이고 함경 평안 황해도는 고조선 고구려, 강원도는 예맥의 땅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팔도라고는 하지만 원래 경기에는 도(道)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정칙이고 경기도에는 이칭이 없다. 나머지 7도에 대한 이칭과 기준은 다음과 같다. 호서(湖西)는 충청도로서 충북 제천 의림지호(義林池湖)의 서쪽이라는 뜻이고, 호남(湖南)은 전라도로서 전북 김제 벽골제호(碧骨堤湖)의 남쪽이라는 뜻이며, 영남(嶺南)은 경상도로서 조령(鳥嶺) 죽령(竹嶺)의 남쪽을 말함이요, 강원도를 영동(嶺東) 관동(關東)이라 함은 대관령 동쪽이라는 뜻이고, 해서(海西)는 황해도로서 경기해의 서쪽이라는 뜻이요, 관북(關北)은 함경도로서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을 말함이요, 관서(關西)는 평안도로서 철령관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이차전령(以次傳令) 차례차례로 전함.
인문득전(因文得錢) 문학으로 재화를 얻어 부귀하게 되는 것.
일거양전(一擧兩全) 한 가지로 인하여 두 가지의 일을 이루다.
일식만전(一食萬錢) 한 번 식사에 많은 돈을 들인다는 뜻으로 극히 사치스러움을 이름.
일심전력(一心專力) 한 마음으로 모든 정력을 기울임.
일어혼전천(一魚混全川)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내를 흐린다.
일인전허십인전실(一人傳虛十人傳實)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열 사람이 그것을 전하는 사이에 사실처럼 전해진다 함이니 말을 신중히 하라고 경계하는 말이다.
일전불사(一戰不辭) 한판 자웅을 겨루는 것. 배수지진과 같은 의미.
일전쌍조(一箭雙雕) 한 대의 화살로 두 마리의 새를 맞춘다는 말로, 단 한번의 조치로 두 가지의 수확을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고사) 북주(北周)에 장손성(張孫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영민하였으며 군사에 관한 지식 또한 많았는데, 특히 활 쏘기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장손성은 후에 돌궐(突厥)의 사신으로 보내지게 된다. 돌궐의 왕 섭도(攝圖) 역시 장손성의 재주를 아껴 존경하고 항상 함께 사냥을 하러 나갔다. 돌궐 사람들은 장손성이 활을 쏠 때 내는 활시위 소리는 마치 벽력소리 같고, 말을 타고 드넓은 평야를 질주하는 모습은 마치 번개와 같다고 감탄의 소리를 하였다. 이날도 장손성은 섭도와 함께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문득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비호처럼 날아가 다른 새가 물고 있는 고깃덩이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섭도는 장손성의 활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도 할 겸해서 화살 두 대를 건네주며 새 두 마리를 동시에 쏴서 떨어뜨리도록 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손성은 말에 채찍질을 하여 앞으로 달려나가더니 한 대의 화살만을 쏘아 새 두 마리를 모두 땅에 떨어뜨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장손성의 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전쌍조'는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 '일석이조(一石二鳥)'와 의미가 같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자전지계(自全之計)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꾀.
장수선무다전선고(長袖善舞多錢善賈) 소매가 길면 춤추기가 수월하고 재물이 많으면 장사를 잘 한다는 뜻으로 조건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기도 쉽다는 말의 비유.
전가지보(傳家之寶) 조상 때부터 대대로 내려 오는 보물.
전가통신(錢可通神) 돈은 귀신하고도 통할 수 있다. 곧 돈의 힘은 일의 결과를 좌지우지한다는 뜻. (고사) 당(唐)나라때 장연상(張延賞)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책도 웬만큼 읽었고 행정 능력도 있어 벼슬길은 순탄했다. 그가 하남(河南)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커다란 의혹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데 황제의 친척을 비롯해서 전직 고관과 지방 유지들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연상은 사건이 사건인 만큼 혐의자를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령하려 하자 누군가가 말렸다. 그러나 장연상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임금의 녹(綠)을 먹는 자는 임금의 근심을 감당해야 한다(食君之綠 擔君之憂·식군지록 담군지우)는 말이 있소. 황제의 친척이니 거물급 소물급 할 것 없이 모두 엄하게 다스릴 것이오." 명령이 내려진 다음날 부윤의 책상위에 쪽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삼만금을 바치오니 더 이상 이 사건을 추궁치 말아달다'는 내용이었다. 장연상은 서슴없이 쪽지를 마룻바닥에 팽개쳤다. 그 다음날 또 장연상의 책상위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십만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돈을 은밀히 전해 받은 장연상은 사건을 흐지부지 끝내 버렸다. 뒷날 어떤 사람의 추궁에 그는 말했다. "십만금은 神하고도 통할 수 있는(錢可通神) 액수인데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받아 들이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나를 죽였을 것이네." 장연상은 너무나 자신감이 넘치게 말을 했다. 본래 이 성어는 유전능사귀추마(有錢能使鬼推磨)와 통한다. 돈만 있으면 귀신을 불러서라도 능히 연자맷돌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뇌물에 대한 차원 높은 풍자다. [출전]《唐書》
전감소연(前鑑昭然) 거울을 보는 듯 앞의 일이 환하게 밝음.
전거가감(前車可鑑) 앞 수레는 뒤 수레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본래 앞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 뒤 수레가경계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말로, 전인(前人)의 실패를 보고 후인(後人)은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고사)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작가로서 약관의 나이에 문제의 부름을 받아 박사가 되었다. 그 당시는 안으로는 제왕(諸王)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밖으로는 흉노의 침입이 잦았다. 이 일로 항상 고심하던 문제는 가의에게 좋은 방책이 없는지 물었고, 가의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진(秦)나라의 환관 조고가 진시황제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에게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호해는 죄인을 죽이거나 그의 가족들을 전부 멸하는 것만을 배웠습니다. 후에 진시황제가 사구(沙丘)에서 죽고, 호해가 황제가 되자, 그는 다음날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던 어떤 이가 충심으로 간언하였지만 자기를 비방한다고 여겼고,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을 올렸지만 간사한 말이라고 여기고 여전히 사람을 풀을 베듯이 죽였습니다. 그의 행동이 이러하다고 하여 본성이 흉악하고 잔인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가르친 사람이 그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누가 관리가 되어야 마땅하지는 모르지만,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또한 앞의 수레가 뒤집힌 것은 뒤 수레의 거울이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夏), 은(殷), 주(周)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망국의 전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수레를 보고 그 안에서 국가 존망의 대계와 치안책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 말은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유사한 말이다. 세계화, 국제화라는 말 속에 전통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어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조차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현들의 풍속 중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 꽤 있다.
전거복철(前車覆轍)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 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 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출전]《漢書》〈賈誼專〉,《說苑》〈善說〉,《後漢書》〈竇武專(두무전)〉(고사) 전한 5대 황제인 문제(文帝)때 가의(賈誼:B.C. 168∼210)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인군(仁君)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은 뒷수레를 위한 교훈[後車之戒]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진(秦)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뿐이옵니다. 국가 존망, 치란(治亂)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 문제는 이후 국정쇄신(國政刷新)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다고 한다. 이 말은 《설원(說苑)》〈선설(善說)〉에도 실려 있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 "술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공손불인(公孫不仁)이 술을 가득 채운 큰 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전거복후거계(前車覆後車誡) 앞의 수레가 엎어지는 것은 뒤의 수레에 경계가 된다는 뜻으로 선인들의 잘못이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가 된다는 뜻.
전거지복철후거지계(前車之覆轍後車之戒) 앞 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은 뒤에 오는 수레의 좋은 경계가 된다는 뜻으로, 맨 처음에 좋은 본보기를 보여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옳게 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전거후공(前倨後恭) 이전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편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 것을 비유한다. (고사) 춘추전국시대에 종횡가(縱橫家)로 손꼽히는 소진(蘇秦)이 있었다. 그는 본래 낙양(洛陽) 사람으로 귀곡자(鬼谷子)를 스승으로 섬겼고, 수년 동안 제후들에게 유세하러 다니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결국 실의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낙향에 아내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형수는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비웃었다. 소진은 두문불출하고는 마침내 종횡의 이론을 생각했다. 소진은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로 가서 제(齊), 초(楚), 위(魏), 한(韓)등 6개 나라가 연합하여 막강한 진(秦)나라에 대항하자는 건의를 했다. 결국 그의 견해는 받아들여져 6국은 소진을 승상의 지위까지 맡겨 진나라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진은 어느 날 북방에 있는 조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그가 집에 도착하자, 그의 형제와 아내는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곁눈질하며 시중을 들었다. 특히 형수의 태도는 더욱 공손하였다. 소진은 그 모습을 보고 형수에게 물었다. "옛날에는 무척 거만했는데, 지금은 이다지도 공손해지셨습니까?" "이제는 서방님의 지위가 높아 감히." 이 말을 듣고 난 소진은 한탄하며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진인데, 부귀할 때는 남들이 두려워하고 빈천할 때는 멸시하니, 부와 명예가 이렇게도 대단하던가!" 우리 주변에도 소진의 형수 같은 무리들이 적지 않음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추종자들의 그들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다.
전격(電擊) 번개가 내리치듯 순식간. 電은 雨와 申의 結合이다. 옛날 여러 가지 氣候 形態 중 農作物과 密接한 關係를 갖는 것은 비였다. 그래서 氣候를 뜻하는 글자에는 모두 '雨'자가 붙어 있다. 雲(구름), 霜(서리), 霧(안개), 雹(우박 박), 霞(노을 하), 雷(천둥 뢰) 등 여기서 申은 본디 번개가 번쩍하면서 섬광(閃光)이 四方으로 뻗치는 模襲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번개는 一種의 電氣的 現像이므로 電은 後에 電氣를 뜻하기도 하여 電力, 電線, 發電, 充電 등의 말이 나왔다. 擊은 손(手)에 창이나 막대기 따위를 잡고 굴대의 수레 바퀴를 툭툭 때리는 模襲이다. 바퀴의 間隔이나 굴대를 調節하기 위해서 인데 後에는 모든 '치는 동작'을 擊이라 했다. 擊滅, 擊墜(격추), 擊退, 擊破, 攻擊, 襲擊(습격), 爆擊이 있다. 곧 電擊이라면 마치 '번개가 내리치듯' 눈 깜짝할 사이에 處理하는 것을 뜻하는데 본디 軍事 用語에서 나온 말이다. 殷의 마지막 王 暴君 주(紂)를 토벌한 이는 희발(姬發-후의 周 武王)이다. 엄청난 劣勢에도 不具하고 융거(戎車)라는 新武器를 使用해 마침내 紂王의 軍隊를 궤멸(潰滅) 시킬 수 있었다. 一種의 가벼운 戰車로 워낙 機動力이 뛰어나 縱橫無盡 敵陣을 유린(蹂躪)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後에 [육도삼략(六韜三略)]에서는 이를 두고 '飛虎 같다고 했는데 電擊은 그것보다 더 빠른 境遇를 가리킨다.
전공가석(前功可惜)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 두었을 때 그때까지 들인 공이 아깝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짧은 시간. 덧없는 인생을 비유. '짧은 시간'을 뜻하는 말이 많다. 순간(瞬間), 찰라(刹那), 경각(頃刻), 수유(須臾) 등. 이 중 가장 짧은 시간은 찰나다. 누군가의 계산에 의하면 하루에 4백80만개의 찰나가 있다니까 약 0. 018초에 해당한다. 한편 순간은 0. 36초, 경각은 15분, 수유는 48분 정도라니까 요즘처럼 분 초를 다투는 시대엔 사실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닌 셈이다. 그러면 전광석화는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에 해당할까. 전광은 번개가 '번쩍'칠 때 나오는 불빛으로 역시 짧은 시간이며, 석화는 부싯돌을 부딪쳤을 때 나오는 불빛으로 현재 라이타를 켜는 시간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전광석화는 0. 5초 정도 되므로 수유나 경각보다는 짧고 순간보다는 긴 시간이 아닐까. 우리 조상들이 수유를 '짧은 시간'으로 여긴 것에서 보듯 시간에 대한 관념은 옛날과 지금이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전광석화라면 지금도 짧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옛날에는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옛 사람들은 흔히 짧은 우리네 인생을 전광석화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람이 태어나 한평생 살아가는 것은 마치 전광석화와도 같다." 회남자[淮南子]에 보이는 말이다. 본디 인생의 덧없음을 뜻했던 말이다.
전국(戰國) 중국 역사에서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 戰은 複雜한 것을 簡單히(單)하기 위해 창(戈)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그러니까 여러 國家가 차츰 하나의 國家로 統合되어 가는 것을 뜻하는데, 平和的인 方法이 아닌 무력(武力)을 使用하는 것이 戰이다.國은 一定한 구역(口)의 땅(一·지평선)에 사람(口·입)이 살고 있고, 그들을 保護하기 위해 武器(戈·창·군대)를 갖추고 있는 模襲이다.그렇다고 戰國이「전쟁을 일삼는 나라」라는 뜻은 아니다.中國의 歷史에서 戰爭이 가장 熾烈했던 時期를 일컫는 말이다.본디 中國의 歷史는 분(分)과 합(合)의 歷史다.그 始發點이된 것이 周나라였다.지금부터 3천 여년 전에 세워졌는데, 땅이 워낙 넓어 王 혼자 다스릴 수 없자 제후(諸侯)에게 땅을 떼어 주어 統治를 委任했다(封建制度).一種의 地方自治制였던 셈이다.後에 天子가 分水를 잃자 諸侯들이 말을 듣지 않게 되고 及其也는 天子를 威脅하는 狀況까지 이르고 말았다.물론 諸侯들끼리는 弱肉强食의 풍조가 일어 戰爭이 끊일 날이 없었다.이 때가 전국시대(戰國時代·BC500∼250)다.본디 170여 개 諸侯國이 이 때에 오면 7개국으로 줄었다(戰國七雄).그만큼 戰爭이 熾烈했음을 뜻한다. 職分을 지키지 않으면 混亂이 오는 法이다.
전귀전수(全歸全受)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을 때는 완전하게 받았으니 죽을 때도 훼손없이 되돌려 주어야 한다.
전대미문(前代未聞)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음. 매우 놀라운 일이나 새로운 것을 두고 이르는 말.
전도양양(前途洋洋) 앞길이 넓어 발전성이 큰 모양.
전도요원(前道遼遠) 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멈. 목적한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멈.
전도유망(前途有望) 앞길에 희망이 많다.
전래지물(傳來之物) 오래 전부터 내려옴.
전무후무(前無後無)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음.
전문거호후문진랑(前門据虎後門進狼)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는 말로, 하나의 재난을 피하자 또 다른 재난이 이어 나타나는 것을 비유한다. 이 말을 <조설항평사(趙雪航平史)>에 나온다. 후한(後漢)의 장제(章帝)가 죽자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 이가 화제(和帝)이다. 나이 어린 임금이 자리에 오르게 되면 외척이나 환관들이 득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당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장제의 황후였던 두태후(竇太后)와 그녀의 오빠 두현(竇玄)이 정권을 잡게 되자, 화제는 명목상의 임금에 불과하게 되었다. 얼마 후, 권력의 맛을 알게 된 두현은 한 걸음 나아가 화제를 시해하고 자신이 직접 제위에 오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화제에 의해 발각되었고, 화제는 당시 실력을 갖고 있던 환관 정중(鄭衆)을 시켜 두씨 일족을 제거하도록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두현은 체포 직전에 자살을 한다. 두시 일족의 횡포가 사라졌다고 해서 화제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두씨 일족을 대신하여 정중이 권력을 쥐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후한은 결국 자멸하게 된다. 명(明)나라 때 조설항(趙雪航)이라는 자가 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씨가 제거되자 환관의 세력이 일어나게 되었다.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 는 속담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전복후계(前覆後戒) 앞수레가 뒤집힌 자국은 뒷수레의 좋은 경계가 된다. 앞의 실수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 전거가감( 前車可鑑 ). 복거지계( 覆車之戒 )
전본분토(錢本糞土) 돈은 원래 똥이나 흙 같이 천한 것임.
전부지공(田夫之功) 힘들이지 않고 이익을 본다는 뜻.
전사물론(前事勿論) 지나간 일의 시비를 논하지 아니함.
전생연분(前生緣分) 전생에서 이미 맺은 연분.
전생지단(傳生之端) 사형을 받아야 할 처지인 죄인의 죄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그것을 밝히고자 살려두고 감형시키게 되는 일의 실마리.
전신불수(全身不隨) 중풍에 걸려 온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
전심치지(專心致志) 한 가지 일에만 오로지 마음을 쓰고 전념함.
전인교육(全人敎育) 편벽된 교육을 배제하고 성격교육과 정서교육 따위를 중요시 하는 교육.
전인미답(前人未踏) 아직까지 아무도 도착한 사람이 없다. 아무도 그것을 하거나 도달한 사람이 없다.
전임책성(專任責成) 오로지 남에게 맡겨서 그 책임을 지게 함.
전전긍긍(戰戰兢兢)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는 모양. [출전]《詩經》〈小雅篇〉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란 몸을 움츠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인《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불감포호)]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敢憑河(불감빙하)]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知其一(인지기일)] 그 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知其他(막지기타)]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戰兢兢(전전긍긍)]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臨深淵(여림심연)]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하네 [如履薄氷(여리박빙)] [주] 요즈음에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적발당할까 봐 쩔쩔매는 경우'에 이 말이 흔히 쓰이고 있음.
전전반측(輾轉反側)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룸. 고민으로 이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 혹은 잠자지 못하고 뒤척임을 되풀이 하는 것을 형용하여 '輾轉反側' 이라고 하거니와, 이 말은 본래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형용해서 하는 말이다. "詩經" "周南"의 관저(關雎)에 이렇게 실려있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좌우로 헤치며 따는도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깨나 구하는도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는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도다. 이 제2절의 결구가 '輾轉反側'이다. 이 노래는 물쑥을 따면서 부르는 연가(戀歌)이다. 즉 노동가(勞動歌)임과 동시에 연애가(戀愛歌)이기도 하다.
전전률률(戰戰慄慄) 몹시 두려워 떰.
전정만리(前程萬里) 나이가 젊어 장래가 유망함.
전지도지(顚之倒之) 엎어지고 넘어지고 매우 급하게 달아나는 모양.
전지전청(轉之轉請) 여러 사람을 통하여 간접으로 요청함.
전차가감(前車可鑑) 앞의 실수를 거울로 삼는다는 말.
전차복철(前車覆轍)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 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 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출전]《漢書》〈賈誼專〉,《說苑》〈善說〉,《後漢書》〈竇武專(두무전)〉① 전한 5대 황제인 문제(文帝)때 가의(賈誼:B.C. 168∼210)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인군(仁君)으로 이름을 남기는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은 뒷수레를 위한 교훈[後車之戒]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진(秦)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뿐이옵니다. 국가 존망, 치란(治亂)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 문제는 이후 국정 쇄신(國政刷新)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다고 한다. ② 이 말은《설원(說苑)》〈선설(善說)〉에도 실려 있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 "술 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공손불인(公孫不仁)이 술을 가득 채운 큰 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전철(前轍) 앞 수레의 바퀴가 남긴 자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이자 송(宋)의 문호(文豪)였던 사람 중에 소순(蘇洵)이라는 者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귀에 익지 않은 人物이지만 그가 바로 소동파(蘇東坡)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다들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소식(蘇軾,호는 東坡)이고, 작은 아들이 소철(蘇轍)이다. 軾이나 轍에게는 모두 「車」자가 있으므로,「수레」와 關係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은 蘇洵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짓게 된 까닭을 밝힌 적이 있다. 軾은 본디 수레 앞에 가로로 걸치는 나무인데 바퀴나 굴대처럼 直接的인 機能을 遂行하진 않지만 그래도 軾이 없는 수레는 있을 수 없다. 곧 蘇洵은 蘇東坡에게「軾」처럼 언뜻 보아서는 없어도 그만인 것 같지만 막상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을 期待했던 것이다. 과연 蘇東坡는 그렇게 人生을 살았던 사람이다. 한편 轍은 수레의 바퀴 자국을 뜻한다. 천하의 모든 수레는 길에 나있는 바퀴 자국을 따라가야 한다. 그럼에도 다들 수레의 功을 稱頌할 뿐, 그 수레가 無事히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바퀴 자국의 功을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轍은 화복(禍福)을 左右한다. 만약 바른 길로 난 자국이라면 뒤 따르는 수레는 安全하겠지만 잘못 나있는 자국이라면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앞서 지나간 바퀴 자국이 前轍이다. 前轍은 有益할 수도 있고,害가 될 수도 있다. 흔히「전철을 밟지 말라」고 한다. 물론 잘못 난 바퀴 자국을 두고 하는 말이다. 前轍을 되풀이해 歷史의 汚名을 뒤집어 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초제근(剪草除根) 풀을 베고 뿌리를 캐내다. 즉 미리 폐단의 근본을 없애 버리다.
전패위공(戰敗爲攻) 실패를 이용하여 도리어 공을 세움.
전호후랑(前虎後狼) 전호후랑이란 전문거호(前門据虎) 후문진랑(後門進狼)의 줄임말로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는 말로 하나의 재난을 피하자 또 다른 재난이 나타나는 것을 비유. (출전) 조설항평사(趙雪航評史) (고사) 후한(後漢)의 장제(章帝)가 죽자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 이가 화제(和帝)이다. 나이어린 임금이 자리에 오르게 되면 외척이나 환관들이 득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당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장제의 황후였던 두태후(竇太后)와 그녀의 오빠 두현(竇玄)이 정권을 잡게 되자, 화제는 명목상의 임금에 불과하게 되었다. 얼마 후 권력의 맛을 알게 된 두현은 한 걸음 나아가 화제를 시해하고 자신이 직접 제위에 오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화제에 의해 발각되었고, 화제는 당시 실력을 갖고 있던 환관 정중을 시켜 두씨 일족을 제거 하도록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두현은 체포 직전에 자살을 한다. 두씨 일족의 횡포가 사라졌다고 해서 화제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두씨 일족을 대신하여 정중이 권력을 쥐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후한은 결국 자멸하게 된다. 명(明)나라 때 조설항(趙雪航)이라는 자가 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두씨가 제거되자 환관의 세력이 일어나게 되었다.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는 속담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전화위복(轉禍爲福) ① 화(禍)를 바꾸어 오히려 복(福)이 되게 함. ②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출전]《戰國策》〈燕策〉(고사)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 곧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재상을 겸임했던 종횡가(縱橫家:모사) 소진(蘇秦)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功)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 소진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주(周)나라의 도읍 낙양[洛陽:산서성(山西省) 내]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제반 지식에 통달한 인물로서 종횡설을 논한《귀곡자(鬼谷子)》3권을 지었다고 함]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B.C. 309)와는 동문이 되는 셈. 제(齊)나라에서 살해됨. (?∼B.C. 317)
전후좌우(前後左右) 앞 뒤쪽과 좌우의 쪽.
절전(折箭) 화살을 부러뜨린다는 말로, 힘을 한 군데로 합하여 서로 협력하는 것을 비유한다. <북사(北史)>"토곡혼전(吐谷渾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북조시대 후위(後魏) 때, 토곡혼(吐谷渾)의 왕 아시(阿豺)에게는 아들이 20명 있었다. 위대(緯代)는 그 중 맏아들이다. 아시가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화살 하나씩을 갖고 그것을 부러뜨려 땅 아래로 던져 보거라." 잠시 후, 이복동생 모리연(慕利延)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 화살 하나를 쥐고 부러뜨려 보아라." 모리연은 그것을 쉽게 부러뜨렸다. 아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화살 열 아홉 개를 쥐고 한번에 부러뜨려 보거라." 모리연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부러뜨리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이때 아시가 말했다. "너희들은 알았느나? 하나는 쉽게 부러뜨리지만, 많은 것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 힘을 하나로 합친 연후에 국가는 견고해지는 것이다." 벽돌 한 장을 쌓아올리는 것은 한 개인의 힘으로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백 층 이상의 빌딩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일은 여러 명의 힘을 합쳐야만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면 국민 한 명 한 명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한다.
조량전(照凉殿) 임금이 판각(版閣)에서 화산대(火山臺) 불놀이를 구셩할 때 임시로 만들어 놓는 관망대(觀望臺)를 말한다. ☞ 중종실록(中宗實錄) 八年癸酉十二月甲子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곧 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승산(勝算)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말. [출전]《孫子》〈謀攻篇〉(고사)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패업(覇業)을 도운 손무(孫武)는 전국 시대에 초(楚)나라의 병법가로서《오자(吳子)》를 쓴 오기(吳起)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리는데 그가 쓴《손자(孫子)》〈모공편(謀攻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또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 [주] 여기서 말하는 '백(百)'이란 단순한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三) ''칠(七)'' 구(九) ''천(千)'' 만(萬)'등과 같이 '많은 횟수' 를 가리키는 것임.
창해상전(滄海桑田) 푸른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된다는 말. 덧없는 세상의 변천을 뜻함.
처첩지전석불반면(妻妾之戰石佛反面) 씨앗 싸움에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
천선지전(天旋地轉) 세상 일이 크게 변함.
초토전술(焦土戰術) 군대가 철수할 때 중요시설을 불질러 적의 공격력을 저지하고 또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함.
촌전척토(寸田尺土) 얼마 안 되는 땅.
추비전패(追飛電牌) 패면(牌面)에 추비전(追飛電) 3자를 새긴 납으로 만든 패. 연산군 때에 궁중에서 쓰는 물건은 정원(政院)을 경유하지 않고 액정서(掖庭署)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어 각사(各司)에 가서 입으로 「무슨 물건을 들이라」했는데 그 가는 사람이 차는 패로서, 급하기가 비전(飛電)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十一年 七月 己亥條 / 유문쇄록(諛聞쇄錄)
충효쌍전(忠孝雙全) 충성과 효도를 모두 겸함.
취자신전(聚者神全) 술에 몹시 취한 사람은 사의(私意)가 없다고 하여 이른 말.
칠전팔기(七顚八起) 일곱 번 실패하고 쓰러져도 다시 분연히 일어서서 도전하는 모습. 흔히 여러 번 실패하여도 재기하여 분투하는 경우를 말함.
칠전팔도(七轉八倒)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째 넘어진다는 말. 계속해서 어려움을 많이 겪을 때 사용하는 말.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이란 뜻으로, 매우 위급한 처지에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풍전지진(風前之塵) 사물이 무상함을 일컫는 말.
혜전탈우(蹊田奪牛) 남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그 소를 빼앗다. 가벼운 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다는 뜻. [출전]《史記》 (고사) 춘추시대 陳(진)나라의 대부 夏徵舒(하징서)가 자기 집에 놀러 와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임금 靈公(영공)을 弑害(시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楚(초)나라 莊王(장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의 수도를 공략하고 하징서를 죽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장왕은 내친 김에 진나라를 초나라의 한 고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장왕이 우쭐해 있을 때 齊(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있던 대부 申叔時(신숙시)가 돌아왔다. 그가 장왕에게 업무 보고만 하고는 그대로 물러 나려고 하자 장왕은 불쾌한 표정으로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하징서가 무도하게도 그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과인이 쳐들어가 그를 죽였다. 諸侯(제후)와 縣公(현공)들이 모두 축하해주는데 그대만 아무 말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신숙시의 대답은 이랬다. "임금을 시해한 죄는 물론 크지요. 그를 처단하신 전하의 의리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해서 그 소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남의 소가 무단히 내 밭을 짓밟았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그렇다고 남의 소를 빼앗는다면 지나친 처벌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후들이 전하를 칭송하는 것은 죄지은 자를 징벌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를 이 나라의 한 고을로 만든 것은 남의 富(부)를 탐낸 것입니다. 죄 있는 자를 징벌하면서 남의 땅까지 탐낸다면 이게 옳은 일이 되겠습니까?" 장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과인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군. 지금이라도 돌려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 신하에 그 임금. 장왕은 빼앗은 진나라를 즉각 원상 회복시켜 주었다.
화전(火箭) 불화살, 지금의 로켓을 의미. 火는 본디 훨훨 타오르는 불꽃의 모습으로「불」을 뜻한다. 화염(火焰)· 화재(火災)· 방화(防火)· 소화(消火)가 있다. 한편 箭은「앞으로(前) 나아가는 대나무(竹)」,곧 「화살」이다. 그 대나무를 시죽(矢竹)· 해장죽(海藏竹)이라 하며 우리 말로는「식대」또는「시누대」라고 한다. 같은 뜻의 글자로「시(矢)」도 있는데 굳이 구별하자면 箭은 材料와 機能을,矢는 화살의 模襲을 强調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火箭은 「불화살」이다. 옛날 화살에 마른 쑥이나 솜을 달아 기름을 적신 다음 불을 붙여 相對方을 향해 쏘았던 것이 시초다.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諸葛亮이 蜀의 학소(壑昭)를 攻擊하자 壑昭가 火箭을 사용하여 反擊했다는 內容이 보인다. 後에 火藥이 發明돼 화살 끝에 小形 원통(圓筒)을 附着하고 그 통 속에 火藥을 채워 불을 붙여 날렸다. 10세기 北宋 初부터 戰爭에 사용되었다고 하며, 13세기 蒙古軍이 南宋의 개봉(開封)을 包圍하다 火箭의 攻擊으로 궤멸(潰滅)되기도 했다. 中國 사람들은 로켓을「火箭」미사일을「비탄(飛彈,나는 폭탄)」이라고 한다. 世界 最初로 火藥과 火箭을 發明한 中國 사람들이 지금은 그것의 改良形이라 할 수 있는 「飛彈」으로 同族의 비탄(悲嘆)을 자아내고 있다.
화전충화(花田衝火) 꽃밭에 불을 지른다는 뜻. 젊은이의 앞길을 막거나 잘 되는 일을 그르치는 일의 비유.